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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 흉내

그림으로 보는 이순신,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

by 맬럭키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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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시리즈
: 그림으로 보는 이순신


 

  오늘은 '그림으로 보는 이순신'을 빌려왔습니다. 앞에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라는 문구가 작게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시리즈가 계속 연재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 세종대왕만 있답니다.

김경민
그림 송진욱
감수 황은희
출판 계림북스

1. 차례

멀고도 험한 무인의 길
전라좌수사가 되어 계속 승리하다
수군을 하나로 모아 싸우다
빼앗긴 바다를 되찾다
죽어서도 영웅이 되다

 

2. 이순신의 어린 시절

  이순신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이 아이는 나라에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니 귀하게 키우거라!"라고 말씀하시는 태몽을 꿨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1545년 4월 28일 한성 건천동에서 이순신이 태어났습니다.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인데 이순신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장군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장군이 되고나서도 강직한 성격탓에 미움을 받고 얻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3. 이순신과 유성룡의 영원한 우정

  이순신은 어린 시절 함께 서당에 다녔는데요. 유성룡이 이순신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며, 어른이 되어서도 둘의 우정이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성룡은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이순신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었으며, 이순신을 수군 장수로 추천해 나라를 지키게한 것도 유성룡이라고 합니다.
 

4. 백의종군

  백의종군이란 조선시대 군대의 벌 중 하나로 군복을 벗고 흰옷만 입은 채 군대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신분이 자체가 낮아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원래의 직책이나 맡은 일을 점시 정지된 상태일 뿐,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다시 원래의 직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었는데요. 첫 번째 백의종군은 녹둔도 전투에서 진 것에 대한 벌이었으나 다행히 여진족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원래 직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나 원균이 칠천도에서 크게 지자 또다시 이순신의 직책을 돌려주었습니다.

5. 전라좌수사가 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에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고 협박하며, 부산과 가까운 나고야에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선조가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부랴부랴 바다를 지킬 장수를 찾자, 유성룡이 능력이 뛰어나고 성품이 곧은 이순신을 추천하였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은 수도인 한성을 중심으로 좌수영과 우수영으로 나뉘었습니다. 좌수영을 맡은 장수를 좌수사, 우수영을 맡은 장수를 우수사라고 불렀는데, 부산에 있는 경상좌수사는 박홍, 거제 또는 통영에 있는 경상우수사는 원균, 해남에 있는 전라우수사는 이억기,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사는 이순신이었습니다. 
 

6. 거북선과 판옥선

  이순신은 판옥선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판옥선은 아래층에서는 노를 젓고 위층에서 공격하는  2층 구조의 공격용 배로, 다른 배보다 높이가 높아 적이 함부로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하였으며 화포 위치도 높아 적의 배를 명중시키기에도 좋았습니다.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때인데요, 이순신이 거북선을 다시 만든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였으나 완성된 것은 임진왜란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거북선은 검은색 거북 등에 용머리를 하고 있는 현무를 상징합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고쳐 만든 돌격용 배로 등에는 쇠못을 박아 일본군이 뛰어들지 못하게 하고, 배의 사방에 화포를 설치하였으며, 용머리 입에서는 불을 뿜어 내거나 화포를 쏘면서 적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7. 임진왜란의 시작

  음력 1592년 4월 13일 조총을 가진 일본군이 부산에 쳐들어왔습니다. 조총의 위력은 방패를 뚫을 만큼 강력했지요. 일본군은 금세 한성까지 밀려들어왔고 1592년 4월 30일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갑니다. 선조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만 명나라는 1592년 6월, 평양성까지 일본에게 빼앗기고 나서야 군사를 보내주지요.
  그러는 동안 1592년 4월 27일 일본군이 경상도를 공격합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순신은 5월 4일 46척의 배를 이끌고 옥포로 향했고, 5월 7일 드디어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에서도 승리하며 1593년 8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가 됩니다.
 

8. 난중일기

  국보 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쟁 중에 쓴 일기로 현재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은 그날그날 치렀던 전투 상황, 날씨, 지형,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등 보고 느낀 일들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난중일기는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이 대한 유일한 기록물이며, 당시 조선, 일본, 명나라 삼국의 관계 등을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를 알게해 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9. 두 번째 백의 종군

  1597년 1월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이 깨지자 일본은 첩자를 시켜 부산을 통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선조는 첩자의 말을 믿고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 하지만 부산 앞바다는 배가 머물 만한 곳이 없어 오히려 일본군의 공격을 받기 쉬워 일본군이 숨어 있다 공격하면 꼼짝없이 당하게 된다고 생각한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이순신 대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히고, 이순신에게는 백의종군하여 적을 물리쳐 공을 세우라고 합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감옥에 갇힌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숨지게 되지만 이순신은 백의종군하여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 장례를 치를 수 없었습니다. 
 

10. 명량 대첩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목숨을 잃자, 1597년 8월 3일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진 조선 수군은 배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조는 수군을 없애고 육지에서 싸우기를 명령하지만 이순신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지요. 이순신은 많은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좁은 바닷길인 명량을 선택하였고,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진 조선 수군들이 겁을 먹자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다른 장수들도 달려 싸우기 시작하여 1597년 9월 16일에 벌어진 명량대첩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물리친 기적같은 전투였습니다.
 

11.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노량 대첩

  1598년 11월 18~19일에 치러진 노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일본군이 쏜 총탄을 맞고 "지금은 전쟁 중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5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전쟁도 끝이 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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